2월은 남극 조간대에서 조사하는 것이 애매해지는 시기입니다. 조사가 가능할 정도로 조간대가 드러나는 날이 출남극 전까지 하루이틀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더 이상의 시료 확보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여 조금씩 쌓아두기만 했던 시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시료를 담은 용기에 적어놓은 정보들이 한국으로 운반되면서 행여나 지워질까봐 라벨지에 연필로 꾹꾹 눌러 적어 용기에 넣는 작업부터 시작합니다. 다행히 그 동안 기록해 둔 정보들이 지워지지 않고 잘 남아있어서 이 작업은 크게 어려움 없이 끝낼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떤 시료들을 채집했는지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컴퓨터에 정보들을 옮기는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냉동이 필요한 시료들을 우선 정리한 후에, 상하지 않도록 고정 용액으로 고정한 시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모아온 시료들을 날짜 별로 쭉 분류해보니 시료가 많은 날도 있고 적은 날도 보이네요.
이렇게 모은 시료들은 쓰러져서 새지 않도록 상자에 차곡차곡 쌓아서 배로 보낼 준비를 하였습니다. 이 시료들 중에는 우연히 채집한 생물들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서 기증받은 생물도 있기도 합니다. 아직 이곳에서 미보고된 종이 있을 수도 있고, 신종으로 보고할 종도 섞여있을 수도 있겠네요. 자세한 것은 이 녀석들이 한국에 도착하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출남극을 하기 5일 전까지는 모든 서류 제출이 완료되어야 하기 때문에, 남은 하계 대원들도 슬슬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저희가 반출해야 할 샘플은 특히 신경 써서 서류를 작성해야 합니다. 저희는 생물, 해수, 퇴적물 등을 가지고 나가야 하는 팀이라 다른 나라에 협조 요청을 하는 공문을 열심히 작성해야 했습니다. 반출해야 할 화물 양을 알기 위해서 냉동 시료를 꺼내 아이스 박스에 꽉꽉 채워 넣어봤습니다. 짐 정리로 바쁜 와중에, 아이스 박스 하나에 가득 찬 샘플을 보니 마음이 좀 흐뭇해지더군요. 남극 연구에 도움이 될 만한 좋은 자료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짐 정리를 하다 보니 이곳에 머물게 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좀 더 이곳에 머물고 싶은데 시간이 너무 빠르게 간 것 같아 아쉽기만 하네요. 방에 있던 개인 짐들도 캐리어와 가방에 차곡차곡 정리하기 시작했고, 기지 실험실에 두었던 물건들과 시료들도 상자에 차곡차곡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상자 일부는 이곳에 두어 내년에 번거롭게 가져오지 않도록 하려고 하고, 장비나 분석이 필요한 시료들은 아라온호에 실어 보내 나중에 받기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짐을 싸 놓으니 이제는 정말 이곳과 안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한국에 돌아가서도 이곳이 많이 그립겠죠?
드디어 출남극하기로 예정된 당일! 아침에는 그럭저럭 남극에서 나갈 수 있게 날씨가 좋아지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구름도 개기 시작했고, 안개도 걷히기 시작했고, 바람도 약하게 불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해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남극에서 나가야 하는 인원이 많기 때문에 크게 세 그룹으로 나누어 아침부터 짐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비행기가 저녁 8시에 이륙하는 것으로 공지가 되어 1조는 2시에 먼저 칠레 기지 쪽 공항으로 출발하였습니다. 2조는 4시, 3조는 6시에 각각 이동하여 모두 한 비행기를 타고 나가는 일정이었답니다.
날씨가 나빠져서 2조 출발 시간이 4시에서 5시로 한 시간 미뤄지긴 했지만 비행기가 취소되었다는 공지는 없어 기지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구명복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조디악에 타려는 순간이었습니다. 오늘 비행기가 취소되었다는 무전! 그렇게 다시 2조 사람들은 구명복을 벗고 캐리어를 들고 원래의 숙소까지 들어가야 했습니다. 먼저 공항 근처에 가있던 1조는 러시아 기지 쪽에 있는 비상숙소에 짐을 놔둔 채 부랴부랴 이틀 치 옷만 챙겨 다시 기지로 돌아왔답니다. 과연 남극에서 무사히 나갈 수 있을까요?
사실 출남극이 취소된 다음날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아침부터 안개가 자욱했고, 일기예보에서 오늘(26일) 날씨는 내내 ‘흐림’ ‘강한 바람’ 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못다한 이야기로 밤을 지새운 사람, 입어야 할 옷을 세탁한 사람 등 전혀 갈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이 잔뜩이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출남극 할 수 있었습니다! 혹자는 ‘탈남극’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내내 안개가 끼고 비가 오더니 저희가 나가려는 그 순간 거짓말 같이 날씨가 진정된 것입니다. 저희는 칠레공군기지에 착륙하는 비행기를 향해 연신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유독 한 곳을 향해 있는 것 보이시나요? 다들 우리를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줄 비행기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남극을 떠나 또 다시 푼타 아레나스 땅을 밟았지만, 감상에 젖을 새도 없이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호텔에 체크인 하고, 식당 문이 닫기 전에 저녁을 먹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가려던 식당에 자리가 없어 한번 헛걸음을 한 뒤, 적당히 저녁을 때우고 오니 벌써 자정이 가까워 오고 있었습니다. 입남극 전에는 홀로 방을 썼는데, 지금은 세종 기지에서 친해진 사람들과 트윈룸을 함께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니 남극에서 샘플뿐 아니라 사람도 얻어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루가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가버렸고, 몸은 무척 피곤하지만 기분은 좋습니다. 오늘 행복한 꿈을 꿨으면 좋겠습니다.
같은 호텔에 숙박하고 있던 하계 대원들이 아침부터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그거 봤어? 메신저 사진 완전 바로 떠!” “야, 동영상도 볼 수 있어” “이제 밀린 웹툰* 볼 수 있다!” (*인터넷 상에서 연재하는 만화) 기지에서 사용하던 1 MB 의 인터넷 속도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그나마도 1 MB를 많은 인원(60명 이상 ㅠ)이 나눠 쓰고 있었으니, 지금의 인터넷 속도가 감격스러울 수 밖에 없었지요. 그동안 밀린 일을 하기도 하고, 인터넷 전화를 이용해 연락하고 싶었던 사람들에게도 연락을 했습니다. 남극 생활이 정말 감사하고 행복했지만, 한국에 있는 이들도 너무나 그립네요. 돌아가는 길이 아무쪼록 안전하고 편안하길 기도해봅니다.
<아, 아름다운 칠레! 이 곳의 맑은 하늘이 이렇게도 보고싶을 줄 몰랐습니다.>
칠레에서 산티아고까지 약 4시간, 산티아고에서 오클랜드까지 약 13시간, 오클랜드에서 인천까지 약 12시간. 저희 세 사람 모두 비행기에서 자도자도 계속 비행기라는 사실에 벌건 눈을 비비며 괴로워했습니다. 몸을 잠깐씩 일으켜 기지개를 켜봐도 몸은 여전히 찌뿌둥했습니다. 경유지에서 잠깐 라운지에 머물렀는데, 송교수님께서는 그새 노트북을 꺼내 논문을 찾아보고 계셨습니다. 안 본 논문이 3개월치나 밀렸다며, 어떤 논문이 나왔는지 훑어보고 계시는 걸 보니 저는 숙연해질 정도였습니다. 저야말로 한참 논문 보고 공부해야 할 학생인데. 교수님의 몸소 보여주시는 참교육에 절로 반성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긴 시간을 지나, 인천 공항에 결국 도착했습니다. 마중 나온 학생들이 어찌나 반갑던지요. 일단 학교로 돌아가 저희를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서는 도대체 언제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저희의 길고도 짧은 남극 출장이 끝이 났습니다. 기행문에 담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다 꺼내 놓을 수는 없겠지요. 조만간 좋은 연구 결과로 남극의 생태계를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Hasta lue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