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소식] 동문 > 남극에서 돌아온 안인영 박사
안인영 박사 (84 석사)
한국해양과학기술원 (KIOST) 극지연구소 책임연구원, 생물연구부장
서울에서 1만7240km, 남미 끝에서도 1200km 떨어진 남극에서 1년간 살다 돌아온 안인영 박사는 아직도 해야 할 연구가 태산이다.
안인영 박사는 2014년 12월부터 1년간 남극 킹조지 섬에 있는 세종과학기지에서 제28차 월동대를 이끌었다. 국내는 물론 아시아에서 여성이 월동대장을 맡은 건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녀가 이끄는 월동대의 주 임무는 세종과학기지에 있는 30여 개의 연구 장비를 1년간 운영하는 거였다. 기상과 고층 대기, 해양분야의 관측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역할이다.
물론 이런 연구를 제대로 수행하려면 기지에서 먹고 자는 일상 생활도 뒷받침돼야 한다. 그녀는 본업인 해양 생물 연구와 더불어 17명에 달하는 월동대 대원의 건강과 기지 내의 갖가지 문제도 살펴야 했다. 근데 한번 생각해보자. 그녀가 월동대장으로서 다녀온 곳은 저편 설악산 공룡능선이나 경북 의성의 얼음 계곡이 아닌 ‘남극’이다. 영하 20℃ 환경에서 사는 펭귄조차 서로의 체온에 기대 처절하게 겨울을 나는 그곳 말이다. “작년 겨울은 예년보다 유난히 추웠어요. 세종과학기지 앞바다도 7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3개월 가까이 얼어 바다 건너 다른 기지들로부터 고립돼 지냈죠. 블리자드(강한 눈보라를 동반한 강풍)도 평년보다 자주 불었고요. 그게 심해지면 체감온도가 영하 30℃ 아래로 떨어지고 한 치앞도 볼 수 없죠. 하지만 솔직히 그리 고통스럽진 않았어요. 나름 즐거웠죠. 남극에도 사계절이 있고, 자연풍경과 생물들의 모습도 매일 변하거든요.”
사실 안인영 박사의 대학 시절 첫 전공은 간호학이었다. 애초에 서울대학교 간호학과에 입학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졸업 후 해양학과 학부 2학년부터 다시 공부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강원도 시골에서 태어난 그녀가 어쩌다 갑자기 바다를 동경하게 되었는지, 그녀 자신도 기억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녀는 대학 졸업 후 ‘하는 김에 좀 더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뉴욕 주립대에서 연안해양학으로 박사 과정까지 마쳤다. 하지만 1990년 서울에 돌아온 그녀는 생각 외로 일자리를 쉽게 얻지 못했다. 10개월을 실업자 상태로 보냈다. 한데 당시 유일하게 그녀에게 일자리를 제안한 곳이 있었다. 바로 지금 그녀가 속해 있는 한국해양연구원의 부설 기관인 극지연구소다. 남극을 향한 그녀의 첫걸음은 그렇게 시작됐다. 1991년 그녀는 본격적으로 극지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서 남극의 해양 생물 연구를 시작했다. 같은 해에 남극하계연구대 일원으로 처음 남극 땅을 밟았다. 칠레에서 남극까지 작은 배를 타고 이동했는데 꼬박 5일이 걸렸다. 뱃멀미가 심해 남극에 도착했을 땐 배가 홀쭉해져 바지가 휙휙 돌아갔다. 당시 한국엔 남극에 다녀온 사람이 200여 명밖에 안 됐다. “1990년대만 해도 세종과학기지의 상황은 지금과 너무 달랐어요. 연구 시설도 차가운 컨테이너 안에 있었죠. 인터넷 전화나 ‘카톡’은 생각도 할 수 없었고요. 인공위성 전화로 한 달에 한두 번 가족과 통화하는 게 다였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환경이 많이 좋아졌어요. 무사 귀환에 방점을 두던 이전과는 다르죠.”
물론 기지 환경이 좋아졌다고 해도 제한된 공간에서 단조로운 일을 반복하다 보면 심리적으로 지치기 마련이다. 음식이나 소리, 냄새 같은 본능에 민감해진다. 짐을 싣고 나르는 일, 유류 탱크를 청소하는 일, 폐기물을 선적하는 일 같은 게 사소하게 느껴져도 강추위 속에선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까지는 기지에서의 생활을 논할 때, 개인의 건강과 행복을 자기 관리의 측면으로 치부한 면이 분명 있었어요. 하지만 이번에 월동대를 이끌면서 그런 것을 조직 차원에서 관리해야 한다고 느꼈죠. 그래서 기지 안에서 대원들과 요리 경연 대회를 하는 등 작지만 알찬 콘텐츠도 이어갔어요. 또 한편으론 단기 체류 당시엔 몰랐던 여러 사실도 알게 됐어요. 매월 사용하는 유류와 전력 소모량, 배수 처리기의 부하 등을 일일이 점검해보니, 무엇보다 에너지와 물을 절약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극의 환경과 해양 생물을 연구하러 간 사람들이 에너지 낭비로 환경을 훼손해선 안 되잖아요.(웃음)”
지난 1년간, 그녀는 여러 연구 중에서도 자신의 전공인 ‘해양 저서·무척추동물’의 생태 연구에 집중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남극의 해양 생태계는 종 다양성의 보고(報告)로, 지구 전체의 생태계 연구에 일익을 담당한다. 쉽게 말해 그녀가 다녀온 세종과학기지는 기후변화에 따라 해양 생태계의 변화를 연구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여전히 기지 주변에선 새 생명이 태어나고, 생존을 위한 활동도 계속된다. “지난해 9월 말 기지에 와서 해양 포유류동물인 웨델해표가 새끼를 낳고 약 한 달간 기지에서 새끼를 키우다 떠났어요. 연이은 악천후로 심리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에 기쁨을 줬죠. 또 다른 웨델해표는 정성스럽게 보살피던 새끼가 죽었는데, 그 시체를 며칠 동안 꼼짝도 안 하고 지키고 있었어요. 극한의 환경 속에도 뜨거운 모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진한 감동을 받았죠. 근데 그런 모습이야말로 월동을 해보지 않으면 경험할 수 없는, 월동이 주는 큰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세종과학기지는 생태 연구 외에 최근 뜨거운 이슈인 기후변화에 대해서도 연구한다. 남극은 지구온난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곳 중 하나로, 특히 세종과학기지 근처의 빙하가 아주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같은 남극이라도 지역에 따라 편차가 심해요. 세종과학기지의 경우 지난 2014년에 완공한 장보고기지보다 기후변화가 아주 빠르게 진행되고 있죠. 지난 50년간 대기 온도가 2℃ 정도 상승했고, 심한 덴 5℃ 정도 상승한 곳도 있어요. 또 세종과학기지 앞바다인 마리아 소만 빙하는 지난 60년간 1.7km가량 무너져내렸고 지금도 계속 빙하가 줄고 있어요. 육상에서도 보기 어렵던 좀새풀이라는 남극 잔디가 바다가 가까운 기지 주변에 계속 퍼져나가는 걸 보면 여러 생각이 들죠.”
안인영 박사는 현재 지난 1년간 남극에서 관찰한 환경 변화와 남극 해양 생물에 대한 기록을 토대로 자연과학 지침서를 준비 중이다. 1년 동안 거의 매일 사진을 찍고 기록한 세종과학기지 주변의 환경 변화와 생물에 대한 관찰 일지다. 그녀는 후배 과학자들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그 책의 출간을 위해 지난 남극 생활의 기억을 차곡차곡 정리 중이다.
극지방은 현재의 기후변화에 지구 상 어느 곳보다도 취약한 곳이다. 특히 남극에 사는 생물은 춥지만 안정된 환경에 적응해 수백만 년, 수천만 년을 살아왔기 때문에 온난화와 같은 기후변화에 약하다. 그 때문에 남극의 환경과 생물을 연구하다보면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재앙을 미리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그 연구의 가장 깊은 지점에 우리의 젊은 과학자들과 안인영 박사가 있다. 앞으로 그녀가 이끌 새로운 연구 활동과 성과를 기대한다.
출처 : 노블레스 Noblesse, 에디터 : 이영균, 사진 : 보라